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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 단종이 처음 입에 댄 밥상, 다슬기국과 겸상의 의미

by 빼둘레햄 2026. 7. 29.

2026년 설 연휴에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는 장항준 감독의 첫 사극이고, 1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습니다. 계유정난 이후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왕 이홍위(단종)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는 넉 달을 다룹니다. 유해진이 연기한 영월 호장 엄흥도, 박지훈이 연기한 이홍위가 중심입니다.

 

이 영화가 이 시리즈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사극이고, 정치극이고, 슬픈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찾아보니 이 영화는 음식으로 감정을 옮기는 구조를 정면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푸드 디렉터 인터뷰까지 공개돼 있습니다.

조선시대 궁중 수라상

 


12첩이 아니라 9첩이었던 첫 수라상

영화의 푸드 디렉팅은 푸드앤컬쳐코리아 이혜원 대표가 맡았습니다. 인터뷰에서 밝혀진 내용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첫 수라상 이야기입니다.(한국경제 이혜원 관련 기사)

 

조선 왕의 상차림은 통상 12첩 반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감독의 지시로 9첩으로 줄여 차렸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힘을 뺐다는 설명입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홍위는 이미 왕위에서 쫓겨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12첩을 그대로 차려 놓으면 화면은 화려해지지만 인물의 처지와 어긋납니다. 첩 수 세 개를 덜어내는 것만으로 "이 사람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라는 정보가 상 위에 올라가는 겁니다. 대사 한 줄 없이 말이죠.

 

그리고 이 상을, 이홍위는 손도 대지 않습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이홍위는 처음 등장하는 수라상부터 마지막 사약까지 입에 대지 않는 인물로 설정돼 있습니다. 먹지 않는 것이 이 인물의 성격인 셈입니다.

소박한 산골 밥상


그가 처음 먹은 밥상에 오른 것들

식음을 전폐하던 인물이 처음으로 숟가락을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을을 위협하던 호랑이를 잡은 뒤 차려진 상입니다.

인터뷰에서 공개된 이 상의 구성이 구체적입니다.

  • 쌀밥
  • 다슬깃국
  • 어죽
  • 산초무침
  • 구운 토끼고기
  • 산삼뿌리
  • 산딸기

궁중 요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강원도 산골에서 그 계절에 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푸드 디렉터는 이 상에 대해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주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대비가 이 영화 음식 연출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9첩 수라상은 손도 안 댔는데, 산나물과 민물 다슬기로 차린 상은 먹습니다. 상의 격이 아니라 상을 차린 마음이 문제였다는 걸, 음식 목록만으로 보여준 겁니다.

딸기와 산나물이 담긴 소쿠리, 나무 마루 위

 


'겸상'이라는 장면

또 하나 눈여겨볼 지점이 겸상입니다.

 

조선의 왕은 원칙적으로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독상입니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 한 상에 앉는다는 건 제도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폐위된 왕과 시골 호장이 한 상에 마주 앉습니다.

 

'겸상'은 그냥 같이 앉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그릇에서 같은 것을 덜어 먹는다는 뜻이고, 그러려면 서로의 위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한국 음식 문화가 유독 찌개 하나를 가운데 놓고 여럿이 숟가락을 넣는 방식으로 발달한 것도 이 감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궁중 요리가 아니라 다슬기국 한 그릇과 겸상 한 번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 장면이라는 건, 사극 치고는 꽤 대담한 선택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을 수 있게 차려진 겸상


만드는 쪽 이야기 — 김이 중요했다

푸드 디렉터 인터뷰에는 현장 이야기도 담겨 있는데, 먹거리 글을 쓰는 입장에서 재미있는 대목이 몇 개 있었습니다.

  • 시대·계절·지역을 고려해 총 15개의 밥상 차림을 준비했습니다. 정확한 고증 자료가 풍부하지 않아 고서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고 합니다.
  • 노루골 잔치 장면에는 1톤 트럭에 가득 실어 나를 정도의 음식이 필요했습니다. 회사에서 1차 조리를 마치고 현장에서 끓이고 볶는 후조리를 했습니다.
  • 배우가 먹지 않는 상은 색감을 살리고 상하지 않게 보존 처리에 공을 들였습니다.
  • 특히 신경 쓴 것이 국에서 피어오르는 김이었습니다. 따뜻한 음식이라는 정보는 화면에서 김으로만 전달되니까요.
  • 쌀밥은 현장에서 직접 지어, 약간 질면서 떡밥처럼 느껴지게 연출했습니다.
  • 사약은 쌍화탕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항목에서 웃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 목록 전체가 "화면에 나오는 음식은 먹기 위한 게 아니라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영월에 가면 — 다슬기국은 실제로 먹을 수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로, 영화 개봉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촬영 자체는 강원도 영월의 <웰컴 투 동막골> 야외 세트장에서 이뤄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영화에 나온 다슬기국이 영월의 실제 향토음식이라는 점입니다. 영월은 물이 맑아 다슬기가 나고, 청령포·장릉 인근에 다슬기 해장국과 다슬기 순두부를 내는 식당들이 있습니다. 매체 소개에 오르내리는 곳으로는 다슬기향촌성호식당이 있습니다.

다슬기국 한 그릇

 

그 밖에 청령포·장릉 동선에서 함께 묶기 좋은 영월 먹거리는 이렇습니다.

  • 감자 들어간 보리밥 — 장릉 인근의 60년 전통 보리밥집이 알려져 있습니다.
  • 메밀전병·메밀부침 — 서부시장에서 파는 강원도식 시장 간식입니다.
  • 닭강정 — 30년 넘게 영업해 백년가게로 인증된 포장 전문점이 있습니다.

동선은 단순합니다. 청령포 → 장릉 → 서부시장 순으로 돌면 반나절이고, 식사는 다슬기국으로 잡으면 영화와 그대로 이어집니다.

(식당 정보는 2026년 3월 매체 기사 기준입니다. 영업시간과 휴무는 방문 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마무리

1600만 명이 본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음식이 다슬기국이라는 건 좀 의외입니다. 화려한 궁중 요리를 얼마든지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영화는 산골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차린 상을 결정적 장면에 놓았습니다.

 

영월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청령포를 보고 다슬기국 한 그릇 드시길 권합니다. 영화에서 먹지 않던 사람이 처음 먹은 국이라는 걸 알고 먹으면, 그냥 해장국이 아니게 됩니다.

 

 

 

 

 

강원도 영월의 강가 절벽과 소나무 숲, 안개 낀 이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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