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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베트의 만찬] 그 교회는 지금 파도에 사라지고 있습니다

by 빼둘레햄 2026. 8. 26.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작품 중에 실제 요리 장면이 이토록 길게, 이토록 진지하게 나오는 작품은 드뭅니다. 198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덴마크 영화 <바베트의 만찬>입니다.

 

원작은 덴마크 작가 카렌 블릭센(필명 이자크 디네센)의 동명 소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소설 속 배경은 노르웨이의 가상 마을 '베를레보그'인데, 영화는 이 배경을 통째로 덴마크 유틀란트로 옮겼습니다.

 

감독 가브리엘 악셀은 원작이 그리는 황량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를 살리려면 노르웨이의 화려한 피오르 풍경보다 덴마크 유틀란트의 삭막한 해안이 낫다고 판단했고, 아예 목조 마을 세트까지 새로 지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실제 장소'는 그래서 소설의 무대가 아니라, 감독이 새로 고른 두 번째 무대라는 점을 먼저 짚고 갑니다.

촛불이 켜진 긴 만찬 테이블

 

어떤 이야기인가

파리 코뮌 시절 남편과 아들을 잃고 덴마크의 외딴 마을로 망명한 프랑스 여성 바베트. 그녀는 금욕적인 개신교 공동체에서 15년째 가정부로 일하다, 어느 날 복권에 당첨돼 1만 프랑을 손에 쥡니다. 그리고 그 돈 전부를, 자신을 거둬준 마을 사람들을 위한 단 한 번의 프랑스식 만찬에 씁니다.

 

영화가 유명해진 건 이 만찬 장면이 실제로 파리 최고급 레스토랑 수준의 코스 요리를 화면 가득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절제와 금욕을 미덕으로 여기던 마을 사람들이 한 입씩 음식을 맛보며 서서히 마음을 여는 과정이,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그려집니다.

실제로 어떤 요리가 나왔나

7코스로 구성된 이 만찬의 메뉴는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습니다.

- 포타주 아 라 토르튀(자라 수프) — 아몬티야도 셰리와 함께
- 블리니 드미도프 — 메밀 블리니에 캐비아와 사워크림을 올린 것, 뵈브 클리코 샴페인과 함께
- 카이유 앙 사르코파주(석관 속의 메추라기) — 푸아그라와 트러플 소스를 채운 메추라기를 페이스트리로 감싼 요리, 클로 드 부조 피노누아와 함께

캐비아와 사워크림을 올린 블리니 드미도프

 

이 중 '카이유 앙 사르코파주'는 실제로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가는, 영화 속 만찬 요리 중 가장 비싸고 정교한 코스로 꼽힙니다. 다만 '블리니 드미도프'는 정통 프랑스 요리 명단에는 없는 이름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 각 단어 자체는 프랑스 요리 용어가 맞지만, 이런 조합의 정식 메뉴로 문헌에 남아있진 않다는 뜻입니다. 영화적으로 조합된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밝혀두는 게 정직할 것 같습니다.

페이스트리로 감싼 카이유 앙 사르코파주

 

촬영지 — 유틀란트의 마을, 그리고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교회

마을 장면은 덴마크 윤란(유틀란트) 북단 벤쉬셀 지역의 비그쇠(Vigsø), 티스테드 코뮌에서 촬영됐습니다. 해안 절벽 장면은 뢴스트럽(Lønstrup)에 있던 마룹 교회(Mårup Kirke)주변에서 찍혔고, 만찬이 열리는 실내 장면은 유틀란트가 아닌 셸란(질랜드)섬의 드락스홀름 성(Dragsholm Castle)에서 촬영됐습니다 — 즉 한 마을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실제로는 덴마크의 서로 다른 지역 세 곳을 이어붙인 결과물입니다.

유틀란트 해안의 목조 마을. 영화를 위해 새로 지은 세트였습니다

 

여기서 꼭 짚고 싶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마룹 교회는 지금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1250년 무렵 지어진 이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는 뢴스트럽 절벽 위에 서 있었는데, 지난 300년간 해마다 평균 1.5미터씩 절벽이 침식되면서 2000년대 중반에는 바다와의 거리가 9미터까지 좁혀졌습니다.

 

결국 덴마크 국립박물관은 자연 침식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기로 결정했고, 교회는 2008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부분 해체됐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낮은 담장 정도의 폐허와, 1808년 이 해안에서 침몰한 영국 프리깃함의 닻이 함께 남아있습니다.

절벽 위에 낮게 남은 마룹 교회의 폐허

 

절제와 소멸, 그리고 그 위에서 단 한 번 피어난 화려함을 그린 이 영화의 배경이, 정작 지금은 파도에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영화의 정서와 겹칩니다.

드락스홀름 성의 만찬장. 영화 속 실내 장면이 촬영된 곳입니다.

 

영화 촬영지를 따라 여행을 한다면

한국에서 덴마크로 향하는 여정은 대부분 수도 코펜하겐의 카스트룹 공항(CPH)에서 시작됩니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 속 아늑하고도 아련한 장소들을 둘러보고 싶다면, 코펜하겐을 기점으로 삼아 덴마크 본토(유틀란트 반도)로 이어지는 영화 같은 로드트립 루트를 따라가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 드락스홀름 성 (Dragsholm Castle)코펜하겐에서 차로 약 1시간 30분

공항에서 차량을 렌트해 서북쪽으로 달리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입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7코스 프랑스 만찬 장면이 촬영된 고성으로, 현재는 고급 호텔과 미슐랭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실제 영화 속 배경이 된 고성에서 특별한 식사와 하룻밤을 즐기며 여정을 시작하기 좋습니다.

 

  • 마룹 교회 폐허 (Mårup Kirke)드락스홀름 성에서 육로+페리 또는 렌터카로 약 3~4시간

셸란섬에서 페리를 타고 유틀란트 반도로 넘어가 북쪽 해안으로 이동하면 영화 속 거친 바람과 파도가 울려 퍼지던 마룹 교회 터에 다다릅니다. 해안 침식으로 교회 건물 자체는 해체되어 지금은 정겨운 석조 담장과 침몰선의 닻만 남아있지만, 거친 북유럽 바다와 절벽이 어우러진 정경은 영화 특유의 묵직한 여운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 비그쇠 (Vigsø)마룹 교회에서 차로 약 1시간

마룹 교회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영화 속 주 배경인 목조 어촌 마을 세트장이 있던 비그쇠 해안에 도착합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북유럽 특유의 황량하면서도 서정적인 해안 풍경을 감상하며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코펜하겐의 현대적인 도시 분위기에서 출발해 고성의 고풍스러운 만찬장을 거쳐, 마침내 거친 파도가 치는 유틀란트의 해안 절벽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영화의 정서와 덴마크의 숨겨진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멋진 기행이 될 것입니다.

 

영화 속 그 성에서 진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까?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7코스 만찬이 펼쳐진  드락스홀름 성(Dragsholm Castle)은 현재 일반 관광객들에게 정식으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800년 역사를 지닌 이 고성은 현재 드락스홀름 성 호텔 (Dragsholm Slot Hotel) 및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으로 운영 중입니다.

드락스홀름 성 호텔 전경

 

 

영화 속 연회장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웅장한 객실에서 하룻밤을 머물거나, 성 내부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즐기는 특별한 다이닝 체험이 가능합니다. 투숙을 하지 않더라도 성 주변의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하거나, 정기적으로 열리는 역사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성 내부와 옛 감옥 터 등을 둘러볼 수 있으니 루트 작성 시 꼭 참고해 보세요!

 

왜 이 영화가 오래 남는가

바베트는 복권 당첨금 전부를 단 하룻밤의 식사에 씁니다. 남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는 말로 자신의 선택을 설명합니다.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던 마을 사람들은 이 한 끼를 통해 처음으로 기쁨과 관용을 몸으로 배웁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그 교회처럼, 이 영화도 언젠가 잊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남아있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한 번 더 꺼내볼 이유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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